800년도 더 전에 역사적인 전투인 「겐페이 전투」가 야시마 섬을 무대로 펼쳐졌습니다.
영화를 누린 헤이케의 총대장 다이라노 무네모리와 전투의 천재 미나모토노 요시쓰네가 이끈 겐지.
자웅을 겨루는 전투의 승패를 결정지은 것이 야시마 섬에서 벌어진 전투였습니다.
헤이케는 왜 야시마 섬에 거점을 두었고, 겐지는 어떻게 공략을 했을까?
그 발자취는 수많은 역사 로망과 함께 야시마 섬 주변에 남아 있습니다.
겐페이 전투란
때는 헤이안 시대 말기.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있던 다이라노 기요모리를 타도하고자 분기한 겐지와 헤이케의 싸움이 「겐페이 전투」입니다. 1180~1185년에 일본 각지에서 펼쳐졌고, 마지막에는 야마구치현 단노우라에서 헤이케가 멸망합니다. 야시마 섬 주변에 남은 다양한 사적을 더듬으며 역사가 움직인 시간을 따라 체험해 보세요.
헤이케, 재기를 노리며 야시마 섬으로.
「겐페이 전투」는 당초, 헤이케가 절대적으로 유리했지만, 기요모리의 죽음을 경계로 형세가 변하여 패전을 거듭했습니다. 그리고 1184년 2월 7일의 「이치노타니 전투」에서 대패한 헤이케는 재기를 꿈꾸며 사누키의 야시마 섬에 거점을 두었습니다.
총문터
헤이케가 임시 궁궐로 지은 수문(守門)
헤이케는 어린 안토쿠 일왕을 데리고 다카마쓰시 무레초에 있는 로쿠만지 절을 임시 궁궐로 삼습니다. 바다 쪽의 방위에 대비하여 수문을 지어 병력 회복을 꾀했습니다.
안토쿠텐노샤(안토쿠샤)
어린 임금 안토쿠 일왕을 모시는 행궁터.
그 뒤, 야시마 섬의 「안토쿠텐노샤」로 궁궐을 옮겨 일대에 일족의 저택을 지었다고 전해집니다. 1183년의 낙향 후, 규슈의 다자이후에서 쫓겨나 마침내 다다른 야시마 섬. 당시, 안토쿠 일왕은 겨우 6살이었습니다.
*아와 지역의 호족이 지은 궁궐. 경내의 안쪽에는 겐페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헤이케의 전사도 모시고 있습니다.
후나카쿠시
헤이케가 겐지의 기습에 대비하여 군선을 숨긴 후미.
헤이케는 왜 야시마 섬을 택했을까? 그 이유 중 하나는 야시마 섬의 지형에 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의 야시마 섬은 바다에 뜬 섬. 공격하기 힘들다는 이점이 있는 데다 매복하기 쉬운 후미와 항구도 있었습니다. 헤이케는 겐지가 반드시 바다에서 공격할 것으로 예상하고 세토나이카이 바다의 방방곡곡에 수군을 배치했습니다.
*야시마 섬 맞은편의 아지 반도에는 배를 숨기기에 알맞은 후미가 있습니다. 헤이케는 이곳에 수군 본진을 두었고, 현재도 「후나카쿠시」라는 지명이 남아 있습니다.
폭풍 속 출항
한편, 겐지 쪽에서는 미나모토노 요시쓰네가 형인 요리토모에게 헤이케 토벌의 명을 받아 2월 16일 셋쓰(현재의 오사카부) 와타나베노쓰에 군사력을 집결. 이튿날인 17일에 출항하지만, 폭풍우 때문에 일시대기합니다. 하지만 밤중에 「반드시 가겠다」는 요시쓰네의 강한 의지로 불과 50척이 출항합니다. 말 50필, 병사 150명을 태운 일본식 배는 약 120km를 6시간에 달리는 경이적인 속도로 기이 해역을 남하하여, 이튿날 아와(도쿠시마현) 지역의 가쓰우라에 도착했습니다.
요시쓰네의 전술
얼핏 보면 강행한 것 같은 진군에는 「뒷바람」을 이용한 것, 해역을 잘 아는 와타나베당의 도움을 얻은 것 등, 전투 천재라 불린 요시쓰네의 「정보 전술」과 「뛰어난 행동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요시쓰네의 결사적인 각오가 운을 불렀습니다. 거친 바다를 앞에 두고 요시쓰네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특히 내 마음에는 최전선에서 목숨을 다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다.」
겐지의 군이 시코쿠 상륙
이튿날 아침인 오전 6시에 아와 가쓰우라에 상륙한 뒤에도 요시쓰네는 시간을 아끼고자 말을 몰았습니다. 지역 호족인 곤도 지카이에에게 길 안내를 받아 야시마 섬의 뒤에 있는 다카마쓰까지 약 60km의 육로를 진군합니다.
그리고 오전 8시. 야시마 섬의 헤이케 궁궐 근처에 도착하여 민가에 불을 지릅니다. 북쪽 바다에서 공격하리라고 생각한 헤이케는 남쪽에서 치고 들어온 데 놀랐고, 민가까지 불에 타자 대군이 왔다고 착각하여 바다로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요시쓰네 안장걸이 소나무
요시쓰네가 야시마 섬을 앞에 두고 한숨 돌린 소나무
자지도 쉬지도 않은 뒤, 마침내 야시마 섬을 눈앞에 두고 한숨 돌린 곳이 「안장걸이 소나무」입니다. 요시쓰네는 애마의 안장을 벗겨 소나무 가지에 걸었다고 전해집니다.
아카바자키
겐지의 군이 야시마 섬으로 가기 전에 붉은 소를 놔준 장소
기세가 오른 겐지는 단숨에 야시마 섬으로 몰려가 안토쿠 일왕의 궁궐을 공격하려 합니다. 하지만 바다에 막혀 쉽사리 건너지 못합니다. 거기서 겐지의 군은 우선 수십 마리의 붉은 소를 바다에 던져 얕은 곳을 알아낸 뒤 야시마 섬에 상륙했다고 전해집니다.
요시쓰네의 전술
당일은 대조(大潮)였고, 오전 8시는 제법 물이 얕았습니다. 요시쓰네는 곤도 지카이에에게 「물이 빠졌을 때라면 말의 배까지밖에 물이 차지 않는다」는 정보를 미리 얻었다고 생각됩니다.
전투의 행방
궁궐에 불을 지른 겐지. 바다 위로 도망친 헤이케. 그러는 가운데, 현대에 전해지는 인상적인 에피소드도 다수 생겨났습니다. 처음에는 기습에 놀란 헤이케지만, 도읍 제일의 궁수 다이라노 노리쓰네는 겐지의 대장 요시쓰네를 향해 활을 쏩니다. 그 순간, 부하인 사토 쓰구노부가 몸으로 막아섭니다.
이오치바타
겐지의 명장 사토 쓰구노부가 순직한 땅
겐지의 사천왕으로 꼽을 수 있는 사토 쓰구노부가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지는 곳에는 쓰구노부의 자손이 쇼와 6년(1931년)에 세운 비석이 남아 있습니다.
기쿠오마루의 묘
헤이케의 젊은 무사의 묘
노리쓰네의 활에 맞아 떨어진 쓰구노부의 목을 취하고자 노리쓰네를 모시던 젊은 무장 기쿠오마루가 달려갑니다. 그것을 막고자 이번에는 쓰구노부의 아우인 다다노부가 기쿠오마루를 활로 쏘았습니다.
사토 쓰구노부의 묘
쓰구노부의 후예가 정비한 묘지 공원
요시쓰네를 대신하여 죽은 사토 쓰구노부의 충심 어린 죽음을 기리고자 1642년에 다카마쓰 번주로 부임한 마쓰다이라 요리시게 공이 만들었고, 그 뒤 1931년에 쓰구노부의 후예가 묘지를 크게 개보수하여 현재의 묘지 공원이 되었습니다.
사토 쓰구노부의 비석
대장을 지킨 충의를 기리며 마쓰다이라 씨가 건립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의 진두에 서서 목숨을 바친 사토 쓰구노부. 무사로서의 충의를 후세에 널리 전하고자 초대 다카마쓰 번주인 마쓰다이라 요리시게가 건립했습니다. 요리시게는 1642년, 다카마쓰 번에 취임한 뒤 이내 이 땅을 방문하여 쓰구노부를 그리워했다고 전해집니다.
스사키지 절
사토 쓰구노부의 보다이지 절
다이도 시대(806~810년)에 구카이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오래된 사찰. 겐페이 전투가 벌어질 때는 요시쓰네의 군대가 부상병을 옮겼다고 전해집니다. 빈사 상태의 쓰구노부도 문짝으로 옮겼다고 하며, 사용했던 무기나 갑옷의 어깨 방어구 등도 남아 있습니다.
다유구로의 묘
요시쓰네 애마의 묘
다유구로는 요시쓰네가 고시라카와인에게 받은 말이며, 이치노타니 전투에서 함께 절벽을 뛰어내려간 애마였습니다. 요시쓰네는 쓰구노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명복을 빌기 위한 시주로 소중한 말을 시도지 절의 승려에게 보냈다고 전해집니다.
요시쓰네의 전술
요시쓰네의 키는 약 160cm로 덩치가 크지는 않았지만, 몸소 최전선에서 싸우는 한편, 부하의 죽음을 슬퍼하는 인정이 민심을 사로잡아 많은 병사들이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우류가오카 언덕
겐지가 진을 펼친 연고지
첫날의 전투가 끝난 겐지의 군은 우류가오카 언덕에 본진을 펼쳤습니다.
나기나타이즈미 / 나키리 지장보살
무사시보 벤케이의 전설을 현재에 전합니다.
본진에는 식사 준비 등 후방에서 전투를 지원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지혜로우며 전설적인 승병 무사시보 벤케이에 관한 일화도 남아 있습니다. 나기나타이즈미는 취사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벤케이가 장검을 이용하여 팠다고 전해지는 우물터입니다. 근처에는 도마 대신 사용되었다는 지장보살(나키리 지장보살)도 있습니다.
전투의 종착
이튿날 아침, 재차 전투에 불이 붙습니다. 양군의 일진일퇴의 공방이 이어지는 가운데, 전투의 격렬함을 나타내는 다양한 에피소드가 남아 있습니다.
요시쓰네 유미나가시 터
무사의 자존심을 엿보다
헤이케를 너무 깊이 쫓은 요시쓰네는 활을 떨어뜨렸고, 가신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갈퀴로 활을 끌어 올렸습니다. 「숙부인 진제이하치로 다메토모의 강한 활이라면 또 모를까 요시쓰네의 활은 약하다며 적이 깔보는 게 싫었다」는 자존심은 「명예를 중시하는 무장담」으로 부하를 감탄시켰다고 합니다.
가게키요의 시코로비키 전설
겐페이 호걸들의 일대일 대결
헤이케 굴지의 호걸인 아쿠시치뵤에 가게키요와 겐지의 무장 미오노야 주로도 격렬한 일대일 대결을 펼쳤습니다. 가게키요는 달아나는 주로의 투구를 갈퀴로 당겨 시코로를 찢었습니다. 가게키요의 괴력과 주로의 강한 목을 이야기하는 에피소드입니다.
*시코로란, 투구의 좌우에 늘어뜨려 목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통상적으로 가죽이나 철 미늘로 만듭니다.
기도 바위
나스노 요이치가 기도를 올린 전설의 바위
저녁에 접어들어 전투도 끝이 나려던 때, 헤이케가 먼바다에서 작은 배를 보냈습니다. 배에는 부채를 끼운 장대를 세워 손짓하는 여성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요시쓰네는 활의 명수인 나스노 요이치에게 「저 부채를 맞혀라」라고 명령합니다. 나스노 요이치는 이 바위 위에서 「나무팔번대보살(南無八幡大菩薩)」이라고 기도를 올립니다.
고마다테 바위
요이치가 활시위를 당겼을 때, 발판이 된 곳.
절대로 빗나가면 안 된다는 압박을 받으며 요이치가 쏜 화살은 훌륭하게 명중. 양군은 박수 갈채를 보냅니다. 「부채 표적」을 든 헤이케가 노린 것은 요시쓰네를 유인할 함정이었겠지만, 요시쓰네가 간파하여 계획이 어긋났습니다.
그 뒤, 아와 및 사누키 지역의 무사가 겐지에 가세하여 단숨에 기세가 올랐고, 헤이케는 야시마 섬을 버리고 서해로 달아났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24일, 야마구치현의 단노우라 전투에서 멸망하는 운명을 맞이합니다.